A miserable failure

12월의 짧은 생각들

블로그에 글을 안쓴지 어느새 세 달이 넘었다. 이러다가 정말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릴것만 같아서, 짧은 생각들을 모아 글 하나를 지어 본다. 0번을 제외하고 순서는 별 의미는 없고, 생각나는 대로 썼다.

00

연말은 늘 그렇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다들 떠있는 것이 느껴진다.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아서 놀기도 좋은 때지만, 나처럼 딱히 일 말고는 할게 없는 사람들에겐(?) 일 하기도 참 좋은 날이다. 연초에 계획했던 못했던 일들을 돌아보며, 한 해를 잘 마무리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해 본다.

01

N잡러의 생활도 이젠 꽤나 익숙해 졌다. 이제 퇴근 후나 주말에 논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익숙해져서, 늘 새로운 일과 공부를 찾곤 한다. 고작 내가 놀아봐야 주말에 늦잠을 좀 더 자는 것일 뿐… 처음엔 여러개를 하면 각각의 것들을 소홀하게 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사실 무언가를 소홀하게 되는 것은 그것을 하는 것이 힘들고, 흥미가 떨어져서이지, 다른 일 때문은 아닌것 같기도 하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시간에 시간 낭비를 꽤 많이 하지 않나? 시간 낭비를 줄이자. 어릴때 난 밤을 새서 컴퓨터 게임을 하곤 했는데, 그런 즐거움이 있다면 일을 밤새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02

며칠 전에 누군가와 각자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짧게 생각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누군가의 장점과 단점을 물어보고 듣는걸 매우 좋아하는데, 약간 나무위키에서 게임 캐릭터 설정 읽는 기분이라 재밌다 ㅋㅋ 어쨌든 과학자이자 개발자로서 나의 가장 큰 장점중 하나는 코드 리뷰를 매우 빠르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니어급 개발자가 6개월에서 1년 정도 개발한 프로젝트를 전체를 완전히 리뷰하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는다. 심지어 메이저한 언어라면 내가 잘 모르는 어떤 언어라도, 주석이나 디버깅 툴의 도움 없이도 그정도 속도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로직을 해석하는 능력도 빠르지만 손도 빠른 편이라 만약에 나에게 익숙한 언어나 프레임워크로 씌여졌다면, 그 프로젝트 전체를 다른 언어로 완전히 컨버팅 하는 시간도 하루 내지 이틀 정도면 충분하다. 일례로 나는 처음보는 2만줄이 넘는 미들급 MATLAB 프로젝트 전체를 Python으로 완벽하게 구현하는데 그쯤 걸리곤 한다. 그에 반면 내 큰 단점은, 지식을 구조화하여 정리하는 습관 혹은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다. 노션과 같은 노트앱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코드에 주석을 달지도 않고, 코드 스니펫 등을 따로 다 정리하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연구노트도 잘 쓰지 않는다. 나에게 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났냐 하면(이건 대참사가 맞다…) 그냥 뭐든 외우고 기억하고 경험적으로, 직관에 의존하여 행동하는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렇다. 정리를 잘 해보고 싶긴 한데, 정리 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결과적으로 정리를 잘 못해서인지 나중에 보지도 않게 되더라. 그러니 더욱 기억과 경험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고, 결국 악순환을 넘어 대참사가 일어났다.

며칠 전, 함께 일하는 연구실 동료와의 미팅에서 내가 이야기한 것들을 자기가 대신 노트를 하고 있다고 들어서 약간 충격을 받았다… 나 정말 기록을 안하는구나!

03

내가 꽤 어린 시절 부터, 지금까지 나를 아껴주시는 은사님께서 매번 강조하며 나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은, 사람은 좋은 조직에 속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좋은 조직이란 다양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으나, 나는 두 가지 요소를 이야기 하고 싶다. 첫째, 능력의 평균치가 높고, 편차가 작을것. 즉 조직에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것이고, 두번째, 잘하는 사람을 잘 인정해 주는 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인정한다는게 한국말로 쓰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appreciate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사람들이 조직을 잘 나가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쌓이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도 좋은 영향력을 받게 되어서 함께 성장한다는 것. 사실 어떤 조직이든 평균이 있고, 그말은 즉슨 평균의 위나 아래인 사람들이 당연히 있기 마련이니 첫번째 조건은 어딜 가든 100% 참이긴 어려울거 같고, 결국 두번째 조건이 발전하는 조직에게 더 필요한게 아닐까 싶다. 스스로가 조직의 평균치보다 높다고 생각한다면, 두번째 조건이 참일 경우 당장 조직을 나가지 않더라도 좋은 조직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아니라면 나가는게 좋은거 같고, 만약 스스로가 조직의 평균보다 낮다고 생각이 든다면, 반드시 스스로 쇄신해야 한다. 스스로에게(그리고 책임감을 가질 위치라면 남에게도)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하고, 도전하고 또 나아가자.

04

얼마 전에 좋아하는 가수와 만나 개인적인 내기를 했었다. 내가 첫 논문을 더 빨리 낼지, 혹은 그 가수가 첫 정규 앨범을 더 빨리 낼지 내기를 했었고, 그 내기를 내적 동기로 발판삼아 나도 참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내 문제이든, 외부적 요인이든 내기에서 졌고, 나는 그 이후로 뼈를 깎는 마음으로 몇 달을 보냈다. 정말 좋아하는 가수라 그 이후에 있었던 공연도, 팬미팅도, 팝업스토어도 가고 싶었는데, 누가 이겼든, 둘다 스스로의 과업을 끝냈더라면 가서 그때 내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웃으며 서로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쨌든 나는 내기에서 졌고, 심지어 아직도 나는 내 일을 마치지 못한 나는 매일 스스로의 한심함을 마주하고 지낸다. 최근 나의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꾼 사건이었고, 나는 그 이후로 아주 오랜 시간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갈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실패한 나를 가장 잘 몰아 붙일 수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이기 때문에 기왕 채찍을 들었으면 가장 먼저 때릴 사람은 나 스스로이다.

05

실링과 플로어, 늘 이맘때쯤 프로 스포츠에서 신입 선수를 평가할때 등장하는 말이다. 현재 즉전감은 아니지만 포텐셜이 높다고 생각하면 실링이 높다고 하고(보통 야구에서는 제구가 좋지 않지만 구속과 체격이 좋을때 쓰곤 한다), 반대로 현재 즉전감으로 쓸 수 있는 신인 선수의 경우 플로어가 높다는 평가를 하곤 한다. 늘 이 실링과 플로어, 그리고 재능과 노력 중에 어느게 중요하냐는 말이 팬들 사이에서 유행하곤 하지만, 사실 난 실링이란 개념을 약간은 믿지 않는다. 물론 기적과 예외는 늘상 있는 일이지만, 나는 잘하는 선수는 계속 잘하고, 못하는 선수는 계속 못한다고 생각 한다. 올해 잘했던 선수는 내년에도 잘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근데 난 고작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입 선수들에게 하는 “지금은 못하지만 포텐셜이 있다”는 평가 조차도 허상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학까지 졸업하고 들어온 회사원이나 대학원생은 어떨까 싶다. 그래서 난 이 나이엔 진짜 포텐셜이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개화했거나, 사실은 포텐셜이 없거나. 즉 이제 나이가 30이 다 된 나 스스로도 이게 내 끝이라 생각 한다. 물론 조금씩은 발전하겠지만 드라마틱하게 피지 않던 꽃이 개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은 내년에도 나보다 잘할거고, 못하는 사람은 내년에도 못할거다. 그렇다고 그 사람 내에서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건 아니다. 운이 좋아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따라잡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못하고 잘하고의 흐름이라도 따라가고 유지하기 위해서 마음을 깎아내는 노력은 필수이다. 노력하자 노력… 마음을 더 선명하게 깎아내자…

06

스스로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하는 생각을 당장 멈춰야 한다.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늘 현실을 직시하고, 이 문제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당연히 남들은 나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고,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친절함도, 그럴 이유도 없으니까… 자괴감이 커질때는 그냥 쭉 커지게 두고, 양분삼아 열심히 살자. 시험 전에 벼락치기 하는 것 처럼, 지금은 못난 내가 결국은 언젠가 또 해결하겠지. 난 어차피 포기할 용기도 없으니까…

07

최근 “가보자고!” 라는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 상승적인 단어라 무척 마음에 든다. 매우 귀엽기도 하고.

08

어느새 또 한 해가 끝나간다. 나는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이제 13년을 버텼다. 그 시간 속에서 스스로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가 돌아보면 마음이 아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