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miserable failure

심입천출 (深入淺出)

심입천출(深入淺出), 깊이 들어가 얕게 나온다는 뜻으로, 자신이 제대로 알아야 남에게도 쉽게 설명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엊그제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인지및생물심리학회 연차학술대회가 끝나고, 오랜만에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E 선배를 만났다. E 선배는 내가 물리학과를 다니며 만난 학과 선배인데, 관심사가 비슷하고, 공부를 정말 열심히 또 잘 하는 선배여서 쉽게 친해져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 오고 있다. E 선배는 현재 중입자 가속기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는데, 나와 다르게 물리학 전공을 살려서 일하는 모습이 참 부럽다. 물론 이는 그 만큼 E 선배가 나보다 더 나은 물리학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현재 학문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넓게 보면 학문이란 과학자의 삶이니까, 삶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먼저 나는 내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있어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 했다. 이유는 학부 때 배운 복소해석학과 상대성이론 등이 정말 너무 어려웠었고(ㅋㅋ), 그것을 “그래 내가 그래도 그걸 어떻게 해내긴 했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학문을 하면서 만나는 새로운 것들을 크게 무서워하지 않고 시도해 본다는 것이었다. (근데 이 말이 내가 새로운 것들을 잘 한다는 말은 아니다 ㅎㅎ; 그냥 좀 덜 두려워 할 뿐이다.) 이 말을 들은 E 선배는 나의 말이 엄청나게 공감된다고 웃으며 곧이어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E 선배는 자기가 학부때 들은 한문 교양 수업에서 배운 “심입천출” 이라는 고사성어가 본인이 삶에서 느끼는 큰 진리 중 하나라고 이야기를 시작 하였다.

심입천출(深入淺出), 자신이 잘 알아야 남에게 쉽게 설명 할 수 있다. 이 말을 듣고, 생각 할 때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너무나 많고 복잡하여 차마 이 글로 다 정리하기가 어렵다. 사실 좀 조심스럽지만, 나는 자기가 가진 것들을 뽐내고,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을 정말로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말로도 한참은 부족하다. 나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그런 사람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 한다. 보통은 겸손하지 않은 모습이라고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기 아는거 자랑하고, 이를 통해 무언가를 이뤄내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무엇을 잘 하는지, 잘 아는지 궁금하다. 그 사람의 깊이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 사람의 세계가 얼마나 선명한 색으로 칠해졌는지 궁금하다. 내 눈에 그런 사람들은 너무나 큰 매력이 있고, 그 사람들이 세상에 기여하는 바 역시도 그 매력 만큼 크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나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을, 그리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또 존경한다. 늘 그런 사람을 쫒고 있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런데 “잘 아는 것”과 “잘 아는 척”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위에서 설명 한 이유로, 잘 아는 사람은 잘 아는 티를 내도 그게 매력적인데… 잘 모르지만 아는 척을 하는 것은 금방 들통이 난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다양한 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충분히 생각 해 볼 시간이 부족 했을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 그런 이유이다. 사람이 무슨 24시간 잠도 안자고 학습하는 딥러닝 모델 마냥 엄청난 경험과 지식을 머리에 쏟아 넣으면 곧이어 “잘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ㅋㅋ). 현실 세계에 사는 우리는 그럴 수 없기에 각자가 모르고, 부족한 분야가 너무나 많을 것이다. 나만 해도 모르고 부족한 것들이 너무나 많아 공부하고 싶은 것이 쌓여 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데, 물리학 전공 도서가 꽂힌 책장을 지나며 진짜 가슴이 “찰랑” 하고 울렁거렸다. 물리학에 대한 마음과 미련을 이겨내기 어려워 그 자리에서 몇 권을 뽑아 읽었다. 이제는 내가 모르는 내용이 너무나 많았고, 그 모든 것이 궁금하고 알고 싶어 책을 읽기 시작 했지만 한 시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책을 꽂고 나왔다. 왜냐면 나는 더 이상 물리학을 천출(淺出) 할 일도, 따라서 심입(深入) 할 필요도 없으니까.

이처럼 이제 앞으로 평생 내가 물리학을 심입(深入) 할 일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학과 달리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분야인 인지신경과학은 다르다. 내가 심입(深入) 하지 않으면 천출(淺出) 할 수 없다. 여기서 천출(淺出)이란 단순히 남에게 설명 하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훈련된 전문가로서 하는 많은 일들이 모두 천출(淺出)이라 볼 수 있다. 연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알고 있다면 연구 할 필요도, 설명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 연구를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전문성을 가지고 한) 일을 설명하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분야에서 천출(淺出)하기 위해서 수 많은 시간을 들여 심입(深入) 해야 한다.

자 이제 또 괜히 폼 잡는 소리를 하나 했으니 이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열심히 공부 할 시간이다. 오늘도 마음을 선명하게 깎아낸다.